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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공동체와 ‘동아시아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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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공동체와 ‘동아시아적 가치’
김용덕
(동북아역사재단)
Ⅰ. 오늘의 세계 상황을 특징짓는 키워드는 정보화와 지구화 그리고 탈(脫)이데올로기화일 것이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현재 정보는 실시간으로 전세계 곳곳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사람과 물자와 재화는 국경을 넘어 지구 범위로 교류되고 있다. 또한 탈냉전 이후, 이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그 지배적 효용성을 잃게 되자 오히려 문화의 다극화 현상이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국가 간의 상호의존도는 심화되어 가고, 기존의 정치·문화·사상도 변용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지역에는 피해의식과 역사적인 갈등을 넘어서는 공통의 정체성(正體性)과 공동의 이익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요소가 개별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관계나 역사․문화적 갈등요소를 억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우선 공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복합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 될 것이며, 편협한 내셔널리즘을 완화시켜 지역 내의 평화와 공존의 실천 구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Ⅱ. 동아시아 지역 내에 공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이념과 가치는 있는 것일까? 흔히 ‘아시아적 가치’라고 하여 서양적인 것에 대한 대응가치로서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공산권의 몰락과 서양의 가치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하여 1970년대 이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만 있는 특수한 문화적 가치로서 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사후(事後)의 논리였다고 하겠다.
물론 전통시대 동아시아에는 중심 가치로서 유가사상이 있었고 이것이 동아시아의 이념을 하나로 엮는 역할을 하였다. 개항 이후 서양 열강의 힘에 눌리면서도 동도서기(東道西器)와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념을 유지하여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동양의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서양의 기술을 부리겠다는 주장이었으나, 제국주의 세력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게 되면서는 서양의 근대적 발전관이 지배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을 묶는 이념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원래, 아시아적(여기에서는 동아시아적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가치라는 것은 불투명한 개념이었다. 또한 그것은 특정한 시각에 의해 형성된 논리이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적 가치는 일찍이 경제적 영역에서 그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끌어낸 힘이 동아시아 전통사회에 내재한 강력한 리더십, 절제의식, 교육열, 가족적 인간관계, 협동과 근면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아시아에 불어닥친 경제위기로 이러한 설명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 문화에 내재한 연고주의, 기업 운영의 불투명성, 정경유착, 부패와 정실인사 등이 경제위기를 불러왔다고 오히려 역기능 요인으로서 매도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국가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유보할 수 있다는 아시아적 개발독재 논리가 동아시아 문화에 내재하는 가치관으로 보여지기도 하였다. 지나친 개인주의와 가족의 붕괴, 도덕적 타락은 서양적 민주주의가 가져온 부정적 요소로서 아시아의 문화전통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매도한 점에서는 일리가 있기도 하였다.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라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연구자들이 아시아의 특수성을 설명하려는 논리임과 동시에, 개발독재국가의 지배자들이 스스로의 권력을 방어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활용하기도 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적 가치의 핵심이라고 할 유가이념이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이 유가이념이 서양적 근대의 발전관을 받아들여 바람직한 이념체계를 만들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른바 국가와 시장의 분리라고 하는 점에서 볼 때, 흔히 배타적인 자율성으로 근대적 관계를 유지해 간다고 하지만, 국가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조화로운 자율성과 의존성을 결합하는 조정자이어야 가장 바람직하다. 이러한 조정된 상호의존성은 유가이념의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욕망을 발전의 원천적인 요인으로 삼는다. 즉 인간의 소비욕망이 생산의 증대로 이어져 자본주의가 발전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빈부격차의 심화와 환경의 파괴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유가이념에서 말하는 자기절제와 수양은 바로 오늘의 세계를 고쳐나가는 바람직한 길을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바람직한 삶과 미래사회에 대한 방향의 제시 즉 효율성과 권위보다는 도덕성과 조화를 배려하는 통치, 국가와 시장 간의 조화로운 조정기능, 자기 절제의 미덕과 사회적 책무의식,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화해의 기능 등은 동아시아적 가치의 근간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유가이념에서 발원한 동아시아적 가치는 단순한 ‘옛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근대를 의미하는 동아시아적 가치의 회복은 비합리적 사회 체제를 긍정하고 권위주의를 합리화할 위험성이 있다. 근대성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가치로서의 동아시아적 가치 그리고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보편적인 규범으로서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정체성은 동아시아 공동체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등장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렇더라도, 동아시아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내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관용과 미래를 향한 공통성을 찾는 노력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공동체는 지리적 근접성을 넘어 문화의 상대적 공통성, 세계질서 내에서의 이념적 보편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 방식의 균형성 등에서 의미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동아시아 공동체는 서로의 영향력을 다른 지역에 행사하기 위한 논리의 포장(수단)이 아니라 장기적인 국가 이익과 보편적인 가치관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개별 국민국가와 국민문화의 존속과 정체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방향은 모든 국가들이 장벽을 허물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겠으나, 현실적으로 국가의 벽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고, 그 절대적 존재이유는 아직도 유효하다. 따라서 현재 바람직한 방향은 경제적 이해와 문화적 공통성을 같이하고 있는 지역 단위의 공동체 형성일 것이다. 동아시아는 바로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논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일 것이다. 물론 국가의 존재가치는 국민의 복지와 인권의 존중이라는 면에서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오늘날처럼 인간의 이동범위와 생활권 그리고 문화향유의 범위가 확대되는 데에 따라 국가를 넘어서는 지역적 공통성과 지역문화의 형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또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는 성격을 달리하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공통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전통시대의 동아시아 지역 내 유대관계를 유지시킨 기본은 유가사상이라든가 한자를 통한 지식의 교류 등이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조공(冊封朝貢) 체제를 전통시대 국제관계의 틀로 갖고 있었다. 이는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 중국이 주변 국가들과 맺었던 전근대적 국제관계로서 국가 간 상호공존의 평화유지 방식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이 근대 서구 중심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지역은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다만 일본이 서양열강을 이어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제국주의국가로 발전해 가며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점하였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동아시아 공동의 권역으로 표방하던 일본은 결국 1945년의 패배로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는 미국과 소련 세력이 대두하였고, 이들이 큰 배후세력이 되어 지역 내에서의 대립이 끊이지 않고 1970년대 말까지 이어져 왔다.
공산권의 몰락과 중국의 개방 등 탈냉전 이후, 1970년대부터 동아시아는 급속도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지역이 되었다. 현재 한국·중국·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의 외화보유고는 2조 6천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세계생산고의 1/4과 세계교역량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경제적 힘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경제적 역내 의존성도 매우 높아졌다. 1986년 동아시아의 지역 내 수출비중이 26%이었는데 2006년에는 46%로 증가했다. 지역 내 무역량은 12배나 증가하였다. 물론 EU의 역내 무역비중이 68%인 것에 비하면 낮다고 하겠으나 EU와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지 못한 단계에서, 동아시아 지역 내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얼마나 빠르게 강화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은 또한 시장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중국․베트남의 정치적 변화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한류(韓流)·일류(日流)·화류(華流)가 서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 지역 내의 발전 방향을 보면 자연스럽게 지역공동체 형성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국제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세력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중국·일본·미국 그리고 남·북한이 이 지역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급속한 군비 경쟁과 핵 개발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동아시아 지역이다. 동아시아 각국은 또한 뿌리 깊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대하여 의존도가 매우 높은 반면, 피해의식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분야도 많다. 중국의 서양 국가들 및 일본에 대한 역사적 피해의식, 일본에 대한 한국의 피해의식, 중국에 대한 베트남의 피해의식 등이 그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의 국가들은 역사적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잘 알려진대로, 한국·중국·일본·베트남 등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나라별로 현재의 영토범위와 구성원이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정치․문화적 독립 단위를 지켜왔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나라의 문화적 독자성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쉽사리 하나의 공통분모를 만들어 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유럽 공동체를 모델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고자 생각한다면, 쉽사리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어려워 보인다. 유럽 공동체와 같을 수 없는 이유는, 우선 국가별 문화의 독자성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역사적으로 왕실과 국민이 유리된 경우가 많았고, 영토의 범위도 자주 바뀐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몇 나라를 빼고는 문화적 독자성이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동아시아의 국가들에 비해서 그렇게 강하다고는 볼 수 없다. 또 다른 차이는 유럽 공동체 내에는 압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없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영토나 인구의 면에서 중국은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고 있다. 유럽 공동체를 모델로 하여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하는 것이 현실성 없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Ⅲ. 오늘의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상적인 전통의 원용이 과연 실현가능한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지식인들 간의 소통을 활발히 해 온 문화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바람직한 동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는 데에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은 앞서 말한대로 오늘날 활발한 경제활동과 문화교류가 이뤄지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 내에서는 이미 서양적 발전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이상 새로운 문화형성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도 하다.
물론 오늘의 동아시아 지역이 단기간에 공통점과 균형점을 찾아내어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를 구성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지역 내 국가들의 존재와 문화적 다양성이 포용되는 전제 하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하면 그것은 실현가능한 바람일 것이다. 동아시아적 가치는 동아시아의 공동체를 묶어주는 기준이지만, 나아가 다른 지역과도 상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적합성과 지역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보일 때 이른바 소프트파워(Soft-Power)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